

펭순이가 간지는 며칠 되었지만
내가 집에온 오늘 묻어주기로 했다.
뒷산에 묻기로 했는데, 생각해보면 뒷산은 우리집에겐 모여봐요 동물의숲 같은 곳이다.
십여년을 키웠지만 마음만큼 잘해주지 못한 게 항상 마음에 걸리는 해피, 불의로 가버린 병아리, 펭순이보다 오래 살다 얼마전에 간 펭돌이, 그 외 친구들까지.
아담한 무덤들이 곳곳에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덤이 많은데, 전혀 무섭지 않은 곳. 오히려 든든하게까지 느껴지는 건 왜일까.
펭순이 이전에 펭돌이가 있었다.
암수 구별 없는 달팽이들에게 굳이 성별 구분을 해준 건 아니고 하는 게 교과서에 나오는 설화에 @돌이 @순이 같아서 붙여줬다.
엄마가 어느날 갑자기 데려왔다는 펭돌이. 엄마가 상추를 샀는데 거기에 붙어있었다는 ㅋㅋ 그래서 어쩌다보니 우리집에 하숙하게 된 친구인데 1년 좀 넘게 장수하고 갔다. 얘는 말을 안들어서 뚜껑을 덮어놨는데 그걸 나오려고 굳이굳이 기를 쓰고 나오려고 하곤 했다.
하루는 엄마가 뚜껑을 깜박한 날이었는지, 애가 없어졌었다. 하루종일 찾다가
보일러를 틀어놔서 뜨끈한 바닥에 익어가는 걸 구했던 적이 있다. 설마 벌써 익어버렸나? 하고 걱정했는데 물에 떨어뜨려놓으니 꾸물꾸물 올라와서 엄마가 얼마나 안심하던지.
펭순이는 아파트 입구 벽에 붙어있는데 어찌나 조그만지 화단에 던져놔도 곧 밟힐거 같아서 데려왔다. 실질적인 케어는 엄마가 해줬지만ㅎ 나름 남매같이 펭돌이와 펭순이가 몇달을 지냈다.
펭순이는 활달한 펭돌이와 달리 한참을 제자리에만 있고 나오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상추나 깻잎 주면 와작와작 먹어가던 펭돌이와 달리 입맛도 깨작깨작거리던 친구였다.
달팽이의 생사는 보통 물에 넣어놨을 때 애가 헤엄쳐서 상추나 돌 위로 올라오는 걸로 판단하곤 했는데.
내가 퇴사했다고 엄마한테 말한 날 펭순이가 움직이지 않는 걸 발견했다고 했다.
그렇게 두개의 막이 동시에 종료가 되었다. 펭순이를 묻어주며 두 막 모두에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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